‘빨치산’은 러시아어 ‘파르티잔(partizan)’에서 나온 말로 노동자나 농민들로 구성된 비정규군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념 논쟁에서 빠지지 않는 ‘빨갱이’라는 말이 이 빨치산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종북, 좌파,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반정부 주의자 등 한국 사회에서는 정치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부정적인 세력으로 취급받는 집단으로 빨치산은 빨갱이와 동격을 이루며, 빨갱이로 낙인찍히면 우리 사회에서는 발붙이며 살아가기 어려웠고 지금도 그 어려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청산리,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항일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도 빨갱이로 낙인찍으면 그의 공적은 사라지고 흉상마저 철거되는 굴욕을 겪어야 하니 말이다.
오늘날에도 이념 논쟁, 색깔 논쟁으로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명명하며 공격하고 증오하는 마당에, 빨치산이었던 부모님과 그런 부모님의 딸로 태어난 작가의 삶은 얼마나 팍팍하고 힘들었을까?
책에 대한 아무런 지식 없이 『아버지의 해방일지』라는 제목을 접했을 때 몇 년 전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2탄쯤 되는 소설인가 보다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소설은 아버지의 죽음에서부터 시작한다.
빨치산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
아버지 고상욱 씨는 이십 년 가까운 감옥살이를 마친 후 고향인 구례 반내골에 자리 잡는다. 아버지는 전기 고문 후유증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지만 명의의 도움으로 ‘나’를 낳았고, 사회주의자답게 의식만 앞선 농부로서 농사엔 젬병이었지만 나름 ‘문자 농사’를 지으며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입만 열면 옳은 말하는 잘나고 똑똑한 양반’이라는 평을 들으며 살아간다. 다만 잘나서 빨갱이 짓하다 집안을 말아먹은 덕에 친척들 사이에서는 겉도는, 특히 하나 남은 혈육인 작은아버지에게는 자기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간 살인자로 각인되어 철천지원수가 되었다. 그런 아버지가 치매에 걸려 여든둘의 나이로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돌아가신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며 아버지의 빨치산 동료들 외에 주변인들을 만나고, 아버지에 대해 미처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평생 알았던 아버지의 얼굴보다 더 많은 얼굴을 본 듯했고 아버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유골을 받아 든 ‘나’는 아버지의 빨치산 동료들이 묻힌 백운산도 아닌, 가족들이 묻힌 묫자리도 아닌, 사람들이 불빛 아래 옹기종기 모여 밥 먹고 공부하고 사랑하고 싸우기도 하는 세상 속에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아버지의 유골을 뿌리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초등학교 시절 국어 시간이었는지 도덕 시간이었는지 잘 기억나진 않지만,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며 북한군에게 살해당했다는 이승복 어린이의 영웅담을 의무처럼 배우면서 한편으론 어린아이의 용기에 감탄했고 한편으론 빨갱이에 대한 적개심을 키워갔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해마다 반공 글짓기를 하거나 반공 포스터를 그리며 빨갱이는 멸공해야 할 존재로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어른이 되어가면서 이승복 어린이의 영웅담도 거짓인 것을 알게 되었고, 머리에 뿔이 달리고 온몸이 빨간 빨갱이란 존재는 적개심을 키우기 위해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세 시대에 마녀사냥으로 처형받았던 마녀처럼, 혹은 <주홍 글씨>의 주인공인 헤스터가 가슴에 새겼던 주홍 글씨처럼 우리가 품고 있는 불만의 화살이 향하고 있는 방향을 돌리기 위해, 우리의 분노를 희석하기 위해 대신 희생당해야 할 존재가 필요했고, 그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빨갱이 몰이가 된 것이다.
‘나’의 어머니에게 사회주의란 첫사랑, 좀 더 풀어쓰자면 여자도 공부를 할 수 있는 세상, 가난한 자도 인간 대접받는 세상에 불과하다고 ‘나’는 말한다. ‘나’의 아버지가 빨치산으로 살았던 것은 48년 겨울부터 52년 봄까지 고작 4년뿐이었지만 사회주의를 금기하고 한번 사회주의자였던 사람은 다시는 세상으로 복귀할 수 없도록 막는 사회 통념 때문에 아버지는 고작 4년의 세월에 박제돼 살아야 했다. 그리고 ‘나’는 빨갱이의 딸로 태어나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고 싶다는 욕망 자체가 비극의 출발점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가야 했다. 아버지는 죽음으로써 비로소 고통스러운 삶에서 해방되는 기쁨을 맞이할 수 있었다. 특정 이념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아닌, 가난 때문에, 차별 때문에, 그저 먹고살기 위해서 빨치산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들에게 연좌제까지 적용하며 고통을 준 사회는 너무나 가혹하다.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기에 소설은 더 현실처럼 다가온다. 또 빨치산 이야기나 여순 사건, 무등산 타잔 사건 등 실제 있었던 사건을 작품 속에 등장시켜 소설이 아닌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이 소설이 단순한 소설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은 비단 고상욱 씨만의 고통과 해방을 다룬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상, 이념 논쟁 따위는 차치하고라도 우리 사회에 자리 잡은 잘못된 편견과 차별로 인해 낙인찍히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이런 현실에서 해방되고 싶은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유골을 사람들이 사는 세상 속에 뿌리는 장면에서 문득 떠오른 시가 한 편 있다. ‘우리가 눈발이라면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라고 노래했던 안도현의 시처럼 고통 속에 있는 제2, 제3의 고상욱 씨에게 ‘항꾼에(함께)’ 손을 내밀어 주고, 위로를 전할 수 있다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방의 날은 좀 더 일찍 찾아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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