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한강
- 출판
- 창비
- 출판일
- 2014.05.19
별빛 하나 반짝이지 않는 캄캄한 밤이었다. 두 눈을 감고 있는 것 같은 어둠. 가늘게 실눈을 뜨면 희미하고 하얀빛이 차츰 그 윤곽을 드러내는 것처럼 어둠 속에서 하나, 둘 등이 켜진다. 암흑을 하얗게 수놓는 등. 그렇게 안개꽃 등이 어둠을 밝히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검은 표지.
『소년이 온다』 - 주홍 글씨처럼 한가운데 박힌 제목을 떠받치며 흰 안개꽃들이 수북이 놓여 있다. 마치 흰 영혼들이 수북이 놓여 있는 것만 같은 표지.
‘죽음’이라는 안개꽃의 꽃말을 떠올리며 왠지 어둡고 습할 것 같은 느낌의 책을 펼쳐 들었다.
전남도청 상무관에는 적십자 병원에서 실려 온 주검들이 흰 무명천이 덮인 채로 누워 있었다. 곤봉에 맞고, 총검에 베여 여기저기 살이 벌어지고, 벌어진 살 사이로 내장 기관이 다 드러난 시신들이, 평온하게 덮인 무명천 아래서는 썩은 냄새만이 아우성치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곳에서 소년 동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제 중3밖에 되지 않은 동호는 함께 시위에 참여했다가 놓친 정대의 시신을 찾기 위해 상무관을 찾았다가 일손이 모자란다는 은숙 누나와 선주 누나의 부탁을 받고 그곳에서 시신들의 성별과 어림짐작한 나이, 입은 옷과 신발의 종류 등을 장부에 기록하고 시신들에 흰 무명천을 덮어주는 일을 하게 된다. 수피아여고 3학년이던 은숙 누나와 양장점 미싱사로 일했다는 선주 누나는 헌혈하기 위해 전대 부속병원에 들렀다가 도청에 일손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시신을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또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다 휴교령 때문에 고향으로 내려온 진수 형은 희생자를 파악하고 시신 관리를 총괄하는 등 시민군을 지휘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총 6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는, 계엄군의 총에 맞아 사망한 이후 영혼이 된 정대와 폭력과 억압으로부터 살아남아, 살아남았다는 죄의식으로 점철된 삶을 살고 있는 은숙과 선주, 죄의식 때문에 결국 생을 마감한 진수와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집으로 데려오지 못해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죄책감으로 힘든 삶을 살아가는 동호 어머니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기관총과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도청에 들이닥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동호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유한다. 엄마와 작은형까지 찾아와 동호에게 집에 돌아가자고 애원하지만, 사람들에게 차마 말하지 못한 진실 – 정대가 군인들의 총에 맞는 걸 동네 사람의 말을 통해 들은 것이 아니라, 실은 자신의 손을 놓친 정대가 자기 눈앞에서 총을 맞고 쓰러진 것을 목격했으나 차마 정대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는 사실 – 때문에 동호는 끝까지 그곳에 남았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1980년 광주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삶도 온전히 살아있는 삶은 아니었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은숙은 불온서적 검열을 받기 위해 시청 검열과를 찾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폭력까지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다. 진수는 계엄군에게 끌려가 극심한 고문을 받은 후유증과 살아남았다는, 살아있다는 치욕에서 벗어나기 위해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을 하게 된다. 선주 역시 여성의 가장 은밀한 부분까지 고문의 대상으로 삼았던 계엄군에 의해 철저히 유린당한 후 이십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악몽에 시달리며 시민군에 관한 증언을 해달라는 윤의 요청에 차마 응하지 못한다.
광기 어린 폭력과 살육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온몸으로 고통을 호소하며 증언하고 있는데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폄하하며 정치적 쟁점으로 삼으려는 작금의 현실이 너무나 죄스럽기만 하다.
광주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사람들에게 반란군이니 간첩이니 빨갱이니 하며 모욕하고 능멸하는 사람들에게 외치고 싶다. 그들은 그저 부서지면서 자신들이 영혼을 갖고 있단 걸,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단 걸 증명하고 싶었던 거라고. 압도적으로 강한 군인들 앞에서 더 큰 힘으로 자신들을 압도하는 양심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끝까지 대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나라를 지켜야 하는 군인들에 의해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고도 한낱 도륙된 고깃덩어리가 되지 않기 위해 태극기로 시신을 감싸고 묵념하고 애국가를 불렀던 것이라고…….
“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된다는 것이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p95
현실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지옥 같은 상황에서 누군가는 자신을 희생하며 선을 실현하고, 누군가는 지독한 악마가 되어 더 잔인한 폭력을 행사하는 상황에서 인간의 내면에 내재한 숭고함과 야만성에 대해 되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
5.18은 1980년 광주에서 끝나지 않았다. 한강 작가가 2009년 1월에 자행된 용산 철거 영상을 보며 광주를 떠올린 것처럼 2024년을 살아가는 오늘날에도 힘으로 짓밟히고 훼손되는 것들이, 그래서 물리적인 형체뿐 아니라 영혼까지 파괴되는 사건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소년이 온다.
폭력과 살육의 현장에서 살아남았지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피폐해지고 고통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이곳으로, 여전히 크고 작은 폭력이 무한 재생되는 이곳으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폭력 앞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양심을 저버리지 않았던 사람들처럼 인간으로서 살아남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지금보다 좀 더 살기 좋은 곳이 되지 않을까?
나도 기꺼이 인간으로 살아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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