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루리
- 출판
- 문학동네
- 출판일
- 2021.02.03
3시간 30분 만에 막을 내린 얼룩말 세로의 일탈
얼룩말 한 마리가 도심 한복판을 질주하다 골목길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입니다. 펜스 안에 갇힌 얼룩말은 마취주사를 맞고 포획됩니다. 이로써 얼룩말의 탈출은 3시간 30분 만에 막을 내리게 됩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얼룩말 세로의 탈출 이야기는 동물원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다양한 패러디를 낳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습니다.
얼룩말 세로의 탈출 사건을 기사로 접하면서 루리 작가의 <긴긴밤>에 등장하는 노든과 어린 펭귄이 떠올랐습니다. 비록 둘의 탈출은 얼룩말 세로의 탈출과는 그 이유가 달랐지만 말입니다.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나, 너, 우리
<긴긴밤>은 지구상에 마지막 한 마리 남은 흰바위코뿔소 노든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시작됩니다.
코끼리 고아원에 있는 동물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노든은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코끼리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자라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노든은 처음으로 자신과 닮은 외모를 가진 가족인 아내와 딸을 만들게 되지만 인간들에 의해 가족을 잃게 되고, 또 다른 인간들에 의해 구조돼 파라다이스 동물원에 보내집니다.
노든은 인간에 대한 복수를 꿈꾸며 그곳에서 만난 동료 앙가부와 탈출을 시도하지만 뿔사냥꾼들에 의해 앙가부가 살해당하고 또다시 절망에 빠집니다. 그러던 중 전쟁으로 인한 폭력에 의해 파라다이스 동물원이 아수라장이 됩니다. 이때 노든은 양동이에 담긴 알을 지키려는 펭귄 치쿠와 함께 동물원을 탈출하게 됩니다. 서로에 대한 접점은 없었지만 곧 태어나게 될 알을 위해 바다로 향하던 중 치쿠는 죽게 되고, 노든이 대신 그 임무를 맡게 됩니다. 알에서 태어난 '나'는 바다를 찾아가는 여정을 통해 노든을 의지하게 되고, 노든 역시 '나'를 의지하게 될 정도로 서로가 가까워지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쳐버린 노든은 인간들에 의해 구조되고 '나'는 노든을 떠나 혼자 바다로 향하게 됩니다.
서로 다른 환경과 처지에 놓인 이들에게 베푸는 이타심
척박한 사막이라는 공간은 노든과 '나'가 느끼는 고통과 시련을 극대화시키고 있으며, '나'가 도달한 드넓은 바다는 어린 펭귄인 '나'가 앞으로 살아가게 될 거대한 세상을 뜻합니다.
육지 동물인 코뿔소가 해양 동물인 펭귄을 위해 길고 긴 사막을 지나 바다로 향한다는 설정은 소설이기에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서로 대비되는 환경에서 살아야 하는 동물들을 통해 소설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더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비슷한 환경에 있는 경우라면 친밀감을 느끼기도 쉽고, 어려울 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도 쉬운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서로 다른 환경이나 처지에 놓여있는 경우라면 서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친해지는 것조차 어려울뿐더러 도움을 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 됩니다. 그렇기에 코뿔소 노든이 '나'를 위해 베푼 노력과 정성이 더 값비싼 희생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자신보다는 타인을 위하는 일이 더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이타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기주의와 대립되는 개념을 이타주의라 말합니다. 이타주의는 타인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 국립 보건원의 실험에 의하면 이타적인 사람일수록 전전두엽이 활성화되고 보상중추가 자극되면서 더 행복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아마 <긴긴밤>에 등장하는 동물들 - 치쿠와 윔보, 노든 외에 코끼리나 코뿔소 앙가부 등은 모두 이타주의를 통해 본인 스스로 더 행복해지지 않았을까요? <긴긴밤>은 인간 세계를 빗댄 우화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긴긴밤>에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코뿔소의 뿔을 자르고 전쟁을 하는 등 이기적인 인간들이 등장합니다. 실제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로 이타적인 사람들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긴긴밤이 아닌, 해가 쨍쨍한 아침을 위하여
동물원으로 돌아간 세로를 향한 사람들의 관심이 뜨겁습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이웃해 사는 캥거루에게 얻어터지기까지 한 세로를 인간의 눈으로 들여다보며 측은지심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래서 동물원에서는 외로운 세로를 위해 짝을 찾아준다 하고, 세로를 보기 위해 관람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동물 전문가들은 세로가 삐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무서워하는 것이라며 무리 생활을 해야 하는 얼룩말이 사회적 관계를 맺을 대상이 없는 동물원에서 생활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합니다. 여기서 동물원이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고라도 인간 대 인간이라는 같은 종뿐만 아니라 다른 종에게도 이타심을 베풀 수는 없는 것인지, 동물원으로 돌아간 세로의 밤은 과연 평온할지 의문이 듭니다.
보통 문학 작품에서의 '밤'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고난과 시련'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의 제목은 <긴 밤>도 아닌 <긴긴밤>입니다. 비록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바다를 찾아가는 노든과 어린 펭귄에게 바다를 찾아가는 여정은 길고 긴 밤처럼 고통과 고난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도 그러합니다. 우리 삶이 늘 해가 쨍쨍 비치는 아침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긴긴밤> 속에 등장하는 동물들처럼 나보다는 타인을 위한 이타심을 베풀 때 우리의 삶은 훨씬 더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이 될 것입니다.
'독서와 함께하는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위대한 개츠비>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0) | 2023.04.10 |
---|---|
<작별인사> 김영하 / 복복서가 (0) | 2023.04.07 |
<영희가 O형을 선택한 이유> 방미진 (0) | 2023.04.03 |
<파리대왕> 윌리엄 골딩 (0) | 2023.04.02 |
<기억 전달자> 로이스 로리 / 비룡소 (0) | 2023.04.0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