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허먼 멜빌
- 출판
- 현대문학
- 출판일
- 2015.06.10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는 아이러니한 상황
몇 년 전 자신의 집에 침입한 도둑을 빨래 건조대로 때려 잡은 20대 청년의 이야기가 사회적으로 논란이 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집에는 여성들밖에 없었고, 새벽에 집으로 귀가한 청년이 도둑을 발견하고 제압을 했는데, 문제는 도둑이 뇌사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법원에서는 20대 청년의 행동을 과잉방어로 봤고 시형을 선고해 논란이 된 것입니다.
신문이나 뉴스를 보면 가끔 이렇게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게 되는 억울한 상황들을 보게 됩니다. 가해자의 폭력을 피하기 위해 한 정당방위가 쌍방폭행이 되거나 오히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정상참작이 된다고 해도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정말 억울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순수함과 절대 선의 상징인 빌리 VS 사악함과 절대 악의 상징인 클래거트
<선원, 빌리버드>에 등장하는 빌리도 그런 억울한 상황에서 결국 사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비어 선장도 임시군법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도 모두 빌리가 억울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알았지만 그의 상황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고, 군대의 기강 확립을 위해 마땅히 희생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순수함의 대명사이자 절대 선의 상징인 빌리는 마지막 죽는 순간에도 비어 함장을 향해 축복을 빕니다. 하지만 사건의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빌리는, 선상반란을 주도하고 상관인 선임위병부사관을 때려죽인 범죄자로 기록돼 전해질뿐이었습니다.
반면 절대 악을 상징하는 클래거트는 어떨까요? 천성적인 사악함을 타고난 클래거트는 모두에게 사랑받는 빌리를 싫어하고 그를 제거하기 위해 선상반란을 주도했다며 빌리를 모함합니다. 결국 그의 의도대로 빌리는 그 배에서 사형을 당하지만 그 이전에 자신 역시 빌리의 주먹에 맞아 즉사하고 맙니다. 하지만 신문에 기재된 그는, '존경할 만하고 신중한 중년 남자이자 부사관'이며 '강한 애국적 충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사건의 내막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신문의 내용대로 그를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 소설의 결말을 보며 약간의 당황스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고전 소설을 공부할 때마다 우리는 늘 '권선징악'이라는 주제에 대해 배웁니다. 하지만 꼭 보상을 받고 화를 피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악하게 살기보다는 선하게 살기를 추구할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행위를 한 사람들이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는 것을 보며 당연하고 통쾌한 결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인인 빌리와 악인인 클래거트의 상황이 역전되는 결과를 보면서 과연 선은 악을 이길 수 있는지, 선을 따르는 것이 항상 옳은 일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사실 빌리와 클래거트로 상징되는 절대선과 절대악이라는 것은 소설에서나 존재하는 것일 뿐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일지 모릅니다. 우리 주변에 놓인 다양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때로 선인이 될 수도 있고 악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있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사실 허먼 멜빌의 단편집에서 <선원, 빌리버드>는 가장 재미가 없는 작품 중 하나였습니다. 줄거리 자체는 간단명료한데 장황한 설명들이 많았기 때문에 <바틀비>나 <베니토세레노> 같은 작품에 비해 지루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지닌 선과 악이라는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오페라로도 각색이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한 번도 공연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오페라로 감상을 한다면 또 어떤 느낌일지 궁금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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